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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암朝宗巖은 조선시대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과 관련된 유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원병한 명나라에 보은하는 뜻에서 1684년(숙종10) 명나라明 의종 毅宗(1611-1644)의 어필 ‘사무사思無邪’, 선조 宣祖(1552-1608)의 어필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 효종 孝宗(1619-1659)의 비사批辭를 송시열 宋時烈(1607-1689)이 직접 쓴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 낭선군 우 朗善君 俁(1637-1693)의 친필 ‘조종암朝宗嵒’ 등 22자를 가평 군수 이제두 李齊杜(1626-1687)와 허격 許格(1607-1690)·백해명 白海明(생몰년미상) 등이 바위에 새긴 곳이다.
조종암 앞에는 조종천朝宗川의 한 지류인 십이탄천十二灘川이 흐른다. ‘조종朝宗’은 여러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뜻과 함께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강물이 여러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듯, 명나라를 향한 충절이 변함없음을 상징하기 위해 조종천 앞 바위에 문자를 새겼다. 조종암 아래에는 허격 등이 세운 단인 ‘이충단二忠壇’이 있고, 그 앞 물길을 ‘이충담二忠潭’이라 하여 이들의 행적을 기렸다.
1784년(정조8) 군수 황승원은 조종암 아래에 정사를 짓고 ‘조종암朝宗庵’이라 하였으며, 1804년(순조4)에는 조종암의 유래를 적은 기실비를 암벽 앞에 세웠다. 1831년(순조31) 명나라 구의사九義士의 후손이 지방 유림과 함께 이곳에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 태조와 구의사를 제향하였다. 이항로 李恒老(1792-1868)는 조종암 아래 너럭바위 위에 정자를 세울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했고, 사후 제자 유중교 柳重敎(1832-1893) 등이 뜻을 이어 1874년(고종11) 정자를 세우려던 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출품작은 이 ‘견심정’ 각자 이후 조종암 일대를 그린 실경 기록화로, 산세·하천·건물과 바위의 배치, 그리고 ‘조종암’, ‘이충단’, ‘대통행묘’, ‘구의행사’ 등 실제 지명이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경승도가 아닌, 당시 유적의 지리와 구조를 충실히 전하는 시각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며, 조선 후기 숭명 공간의 실체와 배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작품 상단에는 ‘조종암도朝宗嵓圖’라는 제목과 ‘황명유민정석일사皇明遺民鄭錫弌寫’이라는 서명이 남아있다.